요 페이지의 제목인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고로 쓴다”는 6월 30일에 쓴 것이다. 당최 무슨 생각으로 이 문장을 썼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오늘 문장과 같은 마음인 터라 이 문장을 붙잡고 무작정 쓰고 있다. 정말 지금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쓰는 거다(TMI. 지금 하는 생각 : 크림치즈 바른 치즈베이글은 역쉬 맛있군).
그래도 약간의 연관성(=이 문장과 같은 마음이 된 이유)을 조미료 마냥 톡톡 뿌려보자면 🥄
“제발 그냥 뭐라도 쓰고 그리자” - 라는 마인드로 이번 주를 살고 있다.
그러니까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사실 나는 꽤 많은 시간을 손놓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던 것 같다.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다? 그리고 싶거나 쓰고 싶은 게 없다? 시간이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아무것도 안 했다. 이렇게 문장으로 쓰려니 좀 부끄러운데, (마음의 소리: 예찬아, 다시 잘 읽어보렴. 이건-) 사실이다.
이제야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했다. 위기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미루다간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서 또다시 두려워졌다. 더군다나 더 미룰 수도 없었다. 8월에는 재정비하던 그림 계정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의심하는 성격이 강해서 바로 시작하기 전에 몇 점을 그려보기로 했는데, 막상 하려니 내 바람만큼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어린아이 마냥 버벅거리고 있었다. 이젠 안 된다. 백지상태면 백지상태인 대로 나를 끌어와 백지 앞에 앉혔다.
그러기를 고작 4일째인데 새삼스럽게 깨달은 게 있다면, 생각이 안 나면 손이라도 움직여야 했다는 것이다. 시선이라도 부지런히 뻗어야 했다. 떠오르는 게 없으면 평소 좋아하는 자료를 자유롭게 보아도 괜찮았고, 소재를 찾아 뒤적거려봐도 괜찮았다. 문장이 안 나오면 좋아하는 글을 잠시 필사해 보는 것도 괜찮았다. 하다못해 백지 위에 무작정 동그라미라도 그려 놓고 다시 생각을 시작해 보는 실없는 시도도 괜찮았다. 그럼 내 안에 있던 게 어떻게든 흘러나왔고,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어떤 결과물이나 기록 같은 게 결국엔 남겨졌다.
가만 생각해 보면 괴상하기 짝이 없는 거라도 일단 내가 만들어 낸 건 나의 유일한 관점이고 손길이다. 충분히 다듬어지지 못해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을 만큼 못나더라도 결국 내게서 나온 것들이다. 나중에 시간을 더하면 내 기대를 뛰어넘는 창작물이 될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과정의 관점으로 보면 이런 방황도 창작을 위한 과정이고, 연습이자, 움직이기 위한 연료를 넣는 시간인데.
더 나아가서, 그렇다면 망작을 쌓는 것도 경험이지 않을까? 그마저도 내가 낳은 나의 유일한 아이디어들이지 않은가? 좀 덜 다듬어진 원석들을 대강 모아놓는 것 같아도, 요것들이 나중에 다시 내게 영감이 되어 돌아오지도 모르는데.
나를 만족시키진 못한 ‘미완성’들의 더미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언젠가의 내게 영감이 되어줄 거친 원석들의 분더카머*일지도 모른다. 정리되지 못한 생각들이, 무작정 쓰고 본 단어들이, 일단 그려본 윤곽선들이 언젠가의 내겐 영감이 될지도 모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보니 이것들은 조금 빛나는 것 같기도 했다. 때가 되어 시간을 더하면 더 빛나게 될 가능성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미완성, 망작들.
*Wunderkammer. 호기심의 방, 진귀한 물건으로 가득한 방, 분더카머((16~17세기에 유럽에서 유행한 진귀한 물품을 모아둔 공간
이거 참, 의외의 지점에서 원동력을 되찾았다. 내가 담긴 나만의 분더카머를 만들자. 어수선하고 조악하기 짝이 없지만 내 눈에는 빛날 가능성이 보이는 아이들의 방을. 분명 마냥 멈춰있는 것보다는 의미 있는 몸짓일 것 같다. 섬세하고 정제된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서슴없이 손을 뻗음으로써 경계선을 넘어 우연을 마주할 수 있는 결과물의 공간도 존중하고 싶어졌다. 그 우연이야말로 예술적인 것이고 새로운 가능성이니까. 아, 이걸 왜 잊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