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일에 디자인을 써먹고 있는 사람으로써, 디자이너에게 특히나 불친절한 일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나는 이걸 디자인에 대한 무지가 아닌 '무시' 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같이 일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거라고. 그리고 세상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디자이너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경우는 일을 주는 사람도 구체적인 계획이 없기 때문에 그 정도의 설명이 나름대로의 최선인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떠먹여 줘야 한다. 상사의 머릿 속에 있는 모든 내용을 뽑아내듯 질문하고, 레퍼런스와 기획안, 초안을 수시로 검토 받은 후에 제작한다. 귀찮아도 어쩔 수 없다. 개떡같이 말한 건 저쪽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일을 두 번 하기는 싫잖아.
결투 신청인가 싶지만 우선 침착하고. 상사에게 캐물은(..) 내용을 바탕으로 일의 분량과 소요 시간(예상 시간보다 훨씬 여유롭게 잡아야 한다. 일의 마무리는 내가 아니라 상사가 하는 것이니까.)을 대략적으로 계산한 뒤 잘못은 그대가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기한 연장을 시도해본다. 주의할 점은, 이런 분들은 보통 결과물이 빨리 나오길 원한다. 그래서 나의 기존 스케줄에 '급건'을 끼워 넣어야만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는데, 더 중요한 스케줄이 있다면 그의 의견을 물어 일정을 조율해보고, 어찌 됐든 최대한 빨리 해보겠다는 말을 덧붙여 작은 성의를 표현해주는 것이 좋다.
지금까지 겪었던 곤란한 상황은 위 두 가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운 좋게도 자율성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고, 협상이 가능한 상사를 만났고,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내 의견을 존중해주셨다. 하지만 나의 상황 대처 능력과 임기응변이 늘어가는 것과는 반대로, 그들은 놀랍도록 제자리였다. 이대로 라면 인간 평균 수명 단축에 기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새로운 데이터가 학습되었다.
그 분의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기획안은 자신이 만들테니 디자인만 잘 입혀 달라고. 꽤 젠틀한 멘트잖아. 다만 그의 기획안에는 정말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기획안을 열어본 순간 묻고 싶었다.
"이렇게 코딱지만하게 우겨 넣은 것들이..과연 제가 이대로 디자인을 한다고 해서 볼만 해질까요?"
기획안이 있는데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경험은 처음이었다. 나는 A4 한 장의 브로셔를 위해 기획안을 재기획하고, 논문체+번역투의 문장을 매끄럽게 뜯어 고치고 기획안의 주인을 설득하며 겨우 디자인을 끝냈다. 그리고 대망의 주간 회의날, 그 자료는 재기획이 필요하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2년 여의 직장 생활로 깨달았다. 이대로 가면 나는 같은 디자인만 두 세번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 분은 기획이 완료되지 않은 디자인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되는 이유는 ‘디자인 된 것을 보지 않으면 결과물이 예상되지 않아서’. 이후 나는 그 분에게 기획안을 받은 후에 '컨펌이 완료된 기획안 인지'를 거듭 물었고 슬프게도 그 분은 내 생각보다 훨씬 심지가 곧은 분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