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와 선정은 사귀는 중 입니다.둘은 올해 서른 둘이 됐습니다. 연애는 육 년 째 입니다.사계절을 함께 겪고 나면 장기연애로 진입하는 거라고 사람들이 말하던 데 정우와 선정은 함께 맞이한 봄이 여섯, 여름이 여섯, 가을이 여섯, 겨울이 여섯 번이나 됩니다. 선정은 고민이 있습니다. 요즘 생긴 고민은 아니고, 제작년부터, 작년부터 하던 고민이 꾸준히 이어진 건데 어쨌든 고민이 있습니다. 선정은 종종 정우를 몇 살로 대해야 할 지 헷갈립니다. 정우는 제작년에도 작년에도 스물아홉 살 인 거 아닌가? 또 선정은 생각합니다. 따지자면 선정과 정우가 함께 한 봄이 세 번 여름이 세 번 가을이 세 번 겨울이 세 번 아닌 가? 백 날도 넘게 실제로 고민해 봐서 선정은 압니다. 답이 없다는 걸. 오늘은 선정의 휴무입니다. 늦잠을 잘 법도 하건 만 선정은 출근시간에 맞춰 일어납니다. 집을 청소하고, 밀렸던 분리수거를 해치웁니다. 정우가 만들어 놓은 프라모델이 전시된 장식장을 열어 붓으로 조심조심 먼지를 텁니다. 시종일관 덤덤한 정우를 흥분하게 하는 유일한 이유가 바로 이 장식장에 있는 녀석들이기 때문입니다. 선정은 정우가 화내는 게 싫습니다. 연인사이에서 누가 그걸 좋아할 까요? 하하. 근데 선정은 부쩍 정우가 화내는 게 보고 싶습니다. 화내는 것만 보고싶을 까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부끄러워하는 것도, 짜증내는 것도. 선정은 모두 전부…… 출근했다면 점심을 먹을 시간입니다. 하지만 휴무이니 점심을 건너 뜁니다. 선정이 집을 나섭니다.갈 곳이 있는 가 보죠? 집에서 조금 떨어진 정류장에서 빨간 광역버스를 탑니다. 선정이 광역버스로 가는 곳은 어디 일 까요? 길찾기 어플에 최단경로로 검색했을 때 두시간 이분이 소요된다고 하는데, 선정은 번번히 두시간 삼십분은 걸려서 도착합니다. 직장인에게 황금 같은 휴무 날, 두 시간 하고도 삼십분을 걸려서 선정은 어디를 온 걸 까요? 하하. 예상한 대로입니다. 어쩜 이렇게 뻔하죠? 선정은 정우를 보러 왔습니다. 역시 애인이 있다면 휴무를 애인에게 양도해야 하는 법 입니다. 사정을 봐주질 않습니다. 어제의 숙취와, 어제의 과로와, 어제의 몸 상태 따위는 모두 내동댕이 쳐야 합니다. 정말이지 연애는 피곤하기 그지없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선정은 이 피곤한 연애를 무려 육 년을 하고 있습니다. 대단하지요? 선정은 정우를 봅니다. 6년을 함께 한 연인을 바라봅니다. 지난 번에 본 모습과 같습니다. 아닌 가요? 머리카락이 자란 것 같기도 합니다. 동시에 선정은 볼 수 없습니다. 정우가 빵에서 건포도를 골라내는 걸. 정우가 선정의 뒤에서 팔꿈치를 잡아오는 걸. 그리고 정우가 선정을 빤히 보는 걸. 선정이 볼 수 있는 정우는 침대에 타인이 눕혀준 자세로 누워 있는 모습 뿐 입니다. 정우는 잠을 자는 걸 까요? 3년을 잤다고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일까요? 정우는 잠버릇이 심합니다. 얼굴 마주보며 안고 잠 들었다가도 정우 발바닥 보고 일어날 때가 많을 정도니까요.3년 동안 정우는 뒤척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잠을 자고 있는 건 아닌 거 겠죠. 선정이 정우의 손톱을 깎아줍니다. 꼼꼼하신 정우 할머니가 매번 깜빡하는 게 손톱입니다. 괜찮습니다. 선정이 잊어버리지 않으니까요. 손톱을 깎기 위해 한참 만지작거리던 정우 손에 깍지를 낍니다. 선정의 손가락은 정우의 손가락 사이에 엉켜 구부러져 있는 데 정우의 손가락은 빳빳하기만 합니다. 선정은 서운합니다. -헤어지자. 고작 손깍지 때문애 이별통보를 하다니. 선정이도 참. 과묵한 정우는 대답이 없습니다. 별 것도 아닌 걸로 이별을 논하는 선정에게 정말이지 적합한 애인이죠?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