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문 100답에서 “맞이하고 싶은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라는 질문에서 영감을 받아 쓰게 된...
제목은 멋진척이 가득한 말이지만 사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음을 자주 생각한다. 나의 죽음도 가족의 죽음도 입 밖으로 많이 꺼낸다. 너무 무섭기 때문에 자주 꺼내게 된다. 자주 꺼내서 저 감정을 덜어내고 싶은 생각이 크기 때문이다.
내가 맞이하고 싶은 죽음 중 하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내고 난 다음의 혼자서 맞이하는 죽음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태어나고 2년 뒤 태어난 내 동생들과 나의 부모님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그들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깊은 애도로 보내고 난 후 죽어야 후회가 없을 듯 하다. 물론 내 동생들이 그들의 가족을 꾸릴 수도 있고 그 때는 나의 존재가 희미해질 수 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들의 죽음앞에서 다 털어놓고 싶었다. 부모의 죽음은 가끔 생각하다가도 눈이 뜨거워질 때가 있지만 그래서 동생하고 자주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요즘들어서는 부모님께도 자주 여쭤본다. 연명치료나 장례 방식에 대해서 물어보곤하는데 그 때마다 부모님의 생각이 달라지신다 ㅋㅋㅋ 내가 나의 죽음의 모습을 그 때 그 때 다르게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 같다. 엄마는 비교적 일정한 편인데 자연으로으 회귀를 가장 많이 말하신다. 고향으로 갈지 바다로 갈지 살고 있는 이 지역일지가 고민이신듯하다.. 나랑 내 동생은 그럴 때마다 우리가 자주 볼 수 있는 곳으로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남아있는 자를 위한 배려를 해달라고 말한다 ㅋㅋㅋㅋ 내가 가장 늦게 죽기를 바라고 있으므로 나랑 가장 가까운 곳에 가족들이 모여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엄마보러 동해에 아빠보러 서해에 동생보러 제주도에 가면 늙은 내가 너무 힘들지 않을까? ㅋㅋㅋㅋㅋ 그들을 충분히 애도하고 그리워하고 아파하고 죽음넘어에 있을 미지의 어딘가가 있다면 거기서 다같이 만나서 내가 여러분의 죽음을 얼마나 잘 보냈는지 생색내고싶다.. ㅋㅋ 이 때 내가 맞이하는 죽음은 내가 아는 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절이나 수도원같은 고요한 곳에서 조용히 마무리하는 것이다.
근 십년간의 연애가 여태 생각했던 죽음의 모습을 다르게 그리게 만들고 있다. 현재의 동반자의 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현재의 동반자에게는 너무나도 미안한 이야기지만..ㅋㅋ) 물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노래가 있는데 임재범의 <이름>이라는 곡이다. 이 노래는 그냥 길가에 피어있는 잡초이고 싶던 내가 너를 만나서 하나의 이름이 되고싶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곡에서처럼 누군가의 존재가 나의 이름을 남기게 하고픈 사람이 되게 했다는 점에서 동반자가 나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있다. 이름이 남는다는 건 내 죽음을 슬퍼해주고 내가 사라졌을 때 내 이름을 기억하는 누군가가 존재했으면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기도 하다. 장례식장을 간다는 건 “누군가”의 가족의 죽음을 애도하러가는 일이 많고 그 분의 죽음을 온전히 그 분의 이름으로 애도받는건 흔치 않는 일이기에 이름을 기억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내 삶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참으로 신기한게 죽음을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삶을 생각하게 된다. 현재의 나의 모습을 보고 미래의 나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역설적으로 죽음이라는 끝을 향해가는 데 삶을 나아가게 한다고 해야하나. 이런 점에서 가끔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음에는 유서를 써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글로 남기니 생각도 정리되고 확장되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