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 @content.st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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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이 질문은 자기 자신을 말할 수 있는 단어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게 만든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내가 내 목소리로 세상에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지.
저자가 기획했던 라디오 프로그램 <자기 자신을 말하기>에서는 출연자가 ‘그것 없이는 자신을 말할 수 없는 단어'를 찾아내면 그다음 단계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그 단어에 대해 말해보게 한다. 예를 들면 채식주의자가 ‘채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서점 주인은 ‘서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말하게 한다.
내 경우에는 ‘인도', ‘환경', ‘서비스기획' 등의 단어가 그렇다. 내게 이 단어들은 어떤 의미이며, 나는 이 단어들을 통해 세상에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걸까. 이 단어들의 본질에는 무엇이 놓여있을까. 이 물음들에 오랜만에 나 자신과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가 시작되었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내가 나를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되는 일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구나.
라디오 피디로 일해온 저자는 세상은 이야기로 구성되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단어 위에서 현실을 살아낸다고 말한다. 자신이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슬픈 세상에서 저마다의 삶을 회복시키는 기쁜 말들을 포착하여 공유한다. 여러 사회적 비극 앞에서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자기 언어를 통해 변화를 희망적으로 바라보고, 또 다른 슬픔 속의 타인을 사랑으로 구해내는 이야기는 힘이 세다. 한 사람의 좋은 이야기는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 변화를 낳는다.
<aside> 💡 수년 전, 나는 제작하기 쉽지 않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자기 자신을 말하기>란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에는 누구나 출연할 수 있지만, 출연자 모두 지켜야 할 엄격한 규칙이 한 가지 있다. 그 규칙은 자기 자신을 말하되 특정한 ‘단어' 몇 가지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신의 삶에 가장 중요한,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말하면 안 된다. 그리고 채식주의자들은 ‘채식’이라는 단어를, 서점 주인은 ‘서점'이라는 단어를, 라디오 피디는 ‘라디오'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
즉 그 단어 없이는 자기 자신을 말할 수 없거나, 자기 자신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단어가 금지되는 것이다. 그 금지 단어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피디가 아니라 출연자 자신뿐이다. 자기 자신을 말하기 이전에 자기 질문이 있는 것이다. ‘그것 없이는 나를 말할 수 없는 단어가 뭐지? 그런 게 있기는 하나? 그 단어가 왜 나에게 중요하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자신의 삶을 꽤나 뒤적거려볼 수밖에 없고 그 과정부터가 프로그램의 시작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처럼 결코 지워지지 않는 흔적 같은 단어 몇 개를 가슴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가슴속에 머무는 비밀스러운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 단어들은 잊지 못할 이름일 수도 있고 사랑, 우정, 약속, 배신, 상실, 후회, 양심, 용기, 죄책감 같은 추상적인 단어일 수도 있고, 그리스, 지중해, 라이카 카메라, 강아지, 태풍, 초등학교 1학년, 프레디 머큐리, wonderful tonight, 여름 호수, 바다, 보리밭, 피아노, 파란 양철대문, 녹슨 자전거, 벚꽃, 노란 리본, 별이 빛나는 사막처럼 구체적인 단어일 수도 있다. 그 단어가 얼마나 다양할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내 상상 속에서 방송은 이렇게 진행된다. 출연자가 ‘그것 없이는 자신을 말할 수 없는 단어'를 찾아내면 그다음 단계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그 단어에 대해 말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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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우리가 서로의 단어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감동적인 면이 있다. 세상은 열심히 우리의 이름과 고유성을 지운다. 생각할수록 삶은 놀라움의 연속이지만 우리의 고유성은 계속 하나의 범주로, 하나의 숫자로 지워져만 간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의 고유성을 지울수록 자기 자신만은 자신의 고유성, 내면에 ‘살아 있는' 어쩌면 아직은 ‘이름 없는' 뭔가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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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자신의 단어를 찾는 것은 쉬워 보여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신의 단어를 찾으려면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다. 늘 보던 대로 자신을 보고, 늘 하던 이야기만 해서는 단어를 잘 찾아낼 수도, 설령 찾았다 해도 말할 방법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마음의 변화는 시간을 필요로 하고 제대로 말하기는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는 일이다. 우리가 의식했건 의식하지 못했건 간에 우리에게 중요한 단어 위에 다양한 현실이 달라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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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한 사람의 좋은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좋은 이야기는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부드럽게' 각인되고 남아서 우리의 자아를 바꾼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드러움 중 가장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것은 인간의 변화다.
어떤 이야기에 감명을 받거나 울림을 얻으면, 그 이야기는 우리의 본질적인 일부가 되는, 혹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낳고, 이 일부가, 그게 작은 것이든 광대한 것이든 상관없이, 말하자면 그 이야기의 후예 혹은 후계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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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내가 오늘 하는 말 중 먼 미래에도 살아남기를 원하는 말이 있는가?”
나의 하루가 공허하다고 느낄 때, 나 자신이 하루 24시간이 낳은 파편 더미에 불과하다고 느낄 때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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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슬픔이 있으므로 기쁨이라는 단어가 필요했던 것처럼, 삶이 짧으므로 오래오래 기억될 아름다움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자유라는 단어가 필요하다. 이 부자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세상이 무엇이라고 하든 우리 안에 파괴될 수 없이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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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당신은 타인을 볼 때 무엇을 보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타인이 무엇을 가졌는지, 무엇을 누리는지를 주로 볼 것이다. 우리는 타인이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에,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을 누린다는 생각에 고통을 받는다. 반면 타인을 볼 때 그 사람이 지고 있는 무게를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자신의 고통으로 타인이 지고 있는 무게를 가늠해보는 사람 또한 드물다. 하지만 아주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의 말은 다르다. 그는 영혼에 바다를 품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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