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너도 내년에 서른인데, 자리를 잡아야하지 않겠니?”
모처럼의 전화에서 나를 맞은 것은 뻔하게 예상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흘려듣기에는 너무나도 깊게 박혀버린 말이었다. 퇴근길의 한복판에 멈춰버린 버스처럼, 어머니의 걱정어린 말은 내 머릿속에서 멈추어버린 것이다.
연 초까지 상황이 좋지 않아, 권고사직을 권한다는 소문이 들린 지, 반년이 지났다. 반년간 스스로 나간 사람은 있어도,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내보낸 적은 없었다. 봄에 진행된 프로젝트가 기대 이상으로 성과가 나와 회사의 상황이 매우 좋았졌기 때문이다. 퇴직금을 계산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상여금을 계산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주변에서도 참 신기한 일이라고 했다. 당장이라도 고꾸라질듯한 회사가 반년만에 다시 정상화 된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인 것은 맞기때문이다.
그 날은 전날 회식이 있고, 회사의 편의로 우리 부서 사람들이 좀 더 일찍 퇴근하는 날이었다. 한 시간이라도 일찍 퇴근하는 그 즐거움은 회사원이라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남들보다 일찍 나서, 일찍 버스를 타고, 운좋게 빈 자리에 앉아 집으로 향했다. 여유가 나니, 몇 주째 들르지도 못한 집 생각이 났다. 전화라도 드릴까 하는 생각으로 저장된 어머니의 번호를 눌렀다. 익숙한 어머니의 목소리와 항상 같은 패턴의 안부 인사들이 지나갔다. 그렇게 간편한 안부를 끝내고 전화를 마치려던 찰나에 말을 꺼낸건 어머니였다.
“내년에도 그 회사 다닐꺼지?”
“아직 고민중이야. 근데, 해보고 싶은걸 해보고 싶어.”
“아이고, 근데 내년까지는 다니는게 어떻겠니?”
저번 통화에서 새로운 일을 해보겠다는 말을 꺼낸 것이 화근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어머니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다고 들은 날부터 걱정이 많으셨다고 한다. 오죽하면 용하다는 점집, 사주집을 다니셨다고 한다. 불행하게 사주집에서는 내년에 매우 힘드니, 이사나 이직을 하지 말라고 했고, 어머니의 걱정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사주에서 그러더라, 내후년에 네가 자리를 잡아서 금방 결혼한다고. 그러니깐, 내년까지는 그 회사에 좀 있으면 좋지 않겠니?”
평소에 내가 하던 일에 대해서 크게 이야기하시지 않던 어머니였다. 나 모르게 여기저기 걱정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시던 적은 많지만, 나에게 직접 이야기하신 적은 없었다. 그런 어머니가 나의 거취에 대해서 이렇게나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신 적은 처음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중에 집에서 따로 이야기하자는 식으로 둘러대며 통화를 빨리 끊으려 했다. 그때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말이 바로 ‘내년에 서른’이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오랜만의 여유는 찝찝함만 남긴 채 끝났다.
1시간이 넘는 퇴근길이 끝나자, 텅 빈 자취방이 나를 맞이했다. 신발장 옆 벽에는 곰팡이 얼룩을 가리려 붙여둔 <멀홀랜드 드라이브> 포스터가 보였다. 꿈을 찾아서 할리우드로 오는 주인공,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너져버린 영화는 지금도 잘 이해는 되지 않았다. 다만, 꿈을 이루고 싶어 그곳이 꿈속이든, 냉혹한 현실이든 떠났다는 것만큼은 내게 기억되고 있었다.
방문을 열자, 어제 밤늦게까지 읽다가만 영화 각본집이 침대위에 뒹굴고 있었다. 독립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은 작품, 시나리오 작가를 꿈꾼다면 한번쯤은 봐야한다는 스테디셀러와도 같은 각본이었다. 각본을 집어 책상위에 던져놓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머릿속 한편에 구겨두었던 어머니의 말이 저절로 퍼져, 머릿속을 가득채웠다.
평범한 지방 대학을 나와서, 졸업을 하니 고향은 너무나도 좁았다. 무엇을 할까라는 고민을 하기도 전에 일단은 돈을 벌어야한다는 생각으로 취업을 하게된 것이 벌써 2년전이다. 영화 시나리오를 만드는 일을 하고싶다는 생각을 제대로 포기하지 못한 채, 일에 치여산 것이 올해로 벌써 3년째가 되었다. 이제는 하고싶은 것과 관련없는 일이 아니라, 하고싶은 것으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뒤덮은 것이 3개월 전의 일이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 한 것이 일주일 전의 일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걱정가득한 말을 들은 게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친한 대학 동기는 퇴사에 대한 말을 함구하라고 조언했다. 나중에 난처한 일을 막는 좋은 방법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동시에 상황이 좋지 않을 시, 회사에 계속 붙어있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놔야 한다고 했다. 여차하면, 실현되지도 못할 꿈을 잠시 미뤄두고 현실에 좀 더 붙어있으라는 말이었다. 현실적이고, 현명한 조언이었다. 다만, 그것이 나에게는 진실한 것인지는 조금 다른 이야기었다.